2019.06.08 조선일보

한평생 세계를 떠돈 엄마, 그의 시를 英譯한 딸

[조선일보]


세계장신구박물관장 이강원씨, 딸 김윤정씨와 '인생의 상비약' 출간
삶·죽음 다룬 詩 71편 중 32편 번역 "글 통해 모녀간 속깊은 대화 나눠"


엄마가 시를 쓰고, 딸이 영역(英譯)했다. 시인이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인 엄마 이강원(72)씨와 딸 김윤정(47)씨다. 모녀는 손바닥만 한 시집을 두고 나란히 앉아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엄마가 한마디 했다. "협업하는 3년 동안 서로 엄청 삐졌어요. 방문 닫고 들어가 말도 안 했다니까요, 글쎄."

이 관장이 최근 딸과 함께 시집 '인생의 상비약'(예지)을 펴냈다. 외교관 남편(김승영 전 주아르헨티나 대사)을 따라 25년간 에티오피아·미국·자메이카·콜롬비아 등 9개국을 거치며 살아본 뒤 일흔의 연륜으로 포착한 삶과 나이 듦, 죽음의 세계를 담았다. '혼자 가는 길' '초상화 반지' 등 71편과 딸이 번역한 시 32편을 엮은 시집이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때로는/ 외로움과 적막함이/ 인생의 상비약인 것을'('인생의 상비약') 구절은 'Do they know at times/ That loneliness can offer/ First aid kit for the soul?'로 번역했다. 이 관장이 말했다. "책 낸 것보다 딸과 함께한 성취감이 더 커요. 내 속마음을 누가 이렇게 읽어줄 수 있을까 싶어서."

서울 세계장신구박물관에서 이강원(오른쪽) 관장과 딸 김윤정씨가 호박 목걸이 앞에 서 있다. 엄마가 쓴 시를 딸이 영역해 책을 낸 두 사람은 “다음엔 모녀가 아니라 두 여자로서 작업해 보고 싶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 관장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94년 마흔일곱 나이에 조병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2002년 남편 은퇴 후 2004년 서울 삼청동에 세계장신구박물관을 열었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호박·금·에메랄드 같은 전통 장신구 1000여 점을 전시했다. 2016년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딸과 시집을 펴낸 건 '정서적으로 밀착된' 번역 작업을 원했기 때문. 이 시인은 "외지 생활의 이끼 붙은 제 시를, 실핏줄까지 읽어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학예사인 딸 김씨도 부모 따라 세계 각지에 뿌리내리길 반복,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해 암스테르담에서 박물관학·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경희대에서 영어로 미술사를 가르친다. 김씨는 "엄마가 걸어온 길을 곱씹는 게 제게도 의미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밀착된 모녀는 역경에 부딪혔다. "시 하나에 2주를 붙드니, 원" 엄마가 곱게 눈을 흘겼다. 딸은 억울하다. "아니, 엄마 시의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싶었는데 뜻을 물으면 꼭 안 알려주세요. '아직 이걸 모르느냐'면서." 그리하여 딸은 '엄마의 공간'을 걸었다. 기왓장 가득한 북촌길, 오래된 나무를 벤 삼청공원의 어느 한쪽…. 김씨는 "일흔 넘어 인생을 해석하는 엄마의 깊은 느낌을 번역하지 못할 땐 너무 답답했다"고 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작업은 이메일로 했다. 딸이 번역본을 보내면, 엄마가 답을 줬다. 딸은 "엄마와 글로 수천 번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고, 엄마는 "시를 받을 때마다 배 밑이 짜르르, 하니 이건 탯줄이다 싶었다"고 했다. 지난겨울엔 단둘이 하와이로 2주간 여행도 다녀왔다. 해질 녘, 동트는 새벽 걸으며 시 얘기를 했다고 한다.

두 번째 협업 계획을 물었다. 엄마는 "조만간"이라 했고, 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웃음이 터졌다. 김씨는 "시의 의미를 온전히 소화 못 해 번역 못 한 시가 많다. 차근차근 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딸을 보던 이 관장이 말했다. "딸은 '베프'예요. 다음엔 모녀지간이 아니라, 두 여자로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