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6.17 한국일보

"박물관 기행" 삼청동 '장신구 박물관'

[한국일보]


'사연없는 보석은 그냥 돌덩어리죠'


미술관과 작은 박물관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선 삼청동길에 노을빛 구리로 덮인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최근 새로 들어섰다. 새 건물이라지만, 살짝 녹슨 듯한 모습. 세월의 고고함이 묻어있다는 뜻일까. 네모나게 각진 모습까지 어울려 마치 집안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보석함을 닮았다. 모양새 그대로다.


세계 각국의 장식품들을 모은 세계 장신구박물관이다. 하지만 이 보석함 안에는 까르티에나 티파니 같은 명품 보석은 없다. 대신 이디오피아의 야채장수 할머니가 쓰던 팔찌부터 소말리아의 어느 결혼식에서 쓰였던 목걸이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온 장신구들이 갖가지 사연을 토해낸다. 장신구박물관은 시인이자 수필가인 이강원 관장이 오랫동안 간진해온 꿈을 실현한 것이다.


김승영 전 대사의 부인인 그녀는 30여년간 남편을 따라 이디오피아,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등 9개국에서 살았고, 60여개국을 여행했다.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외교가의 화려한 파티나 비싼 보석들이 아니었다. 대신 민족 대대로 내려온 전통의 장식품이었다.


'30년간 60개국에서 3,000여점 수집' "1978년이었어요. 이디오피아를 여행하다 어느 시장에서 한 유목민이 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장신구와의 열애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1990년대 초반 이디오피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은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케이스. 정치적 혼란으로 내전이 터지자 다른 외교관 가족들은 서둘러 외국으로 피신했으나 그는 때마침 아프리카 부족의 19세기 목걸이가 시장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10시간이나 차를 몰고가 목걸이를 구입했다. "어디서 장신구가 나왔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죠.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가져온 장신구들은 정성껏 닦고 만지며 아기 다루듯 했다.


지금까지 이 관장이 모은 것은 3,000여점. 박물관에는 그 중 1,000여점 정도 전시됐다. 특히 장신구 만큼 전시실의 배치도 아름답다.


전시실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호박 장신구는 '지구의 눈물'이라 불리는 물건. 호박은 송진이 3000만년에서 5000만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널리 애용됐는데 우리나라에도 실크로드를 타고 전해져 장신구로 많이 사용됐다.


'호박의 벽'이 소박했다면 '엘도라도의 방'은 눈부시다. 콜럼비아 등 라틴아메리카의 10~16세기 금 장신구들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멕시코의 마야 유적이 건축물 위주였던 반면 콜럼비아는 화려한 장신구가 많아요. 왕위 계승자는 몸에 진흙과 금가루를 바르고는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에메랄드 장신구를 호수에 던지면서 왕이 되었지요."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시실로 꼽히는 것은 이 관장이 '비즈와 아이보리의 대화'라고 이름 붙인 곳. 베니스, 체코,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유리 구슬 목걸이들이 원통 기둥을 둘둘 감고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 목걸이 반해 유럽인들에게 금과 노예를 다 내줘 버렸어요.'


박물관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은 '십자가의 방'이다. 13세기에서 19세기 이디오피아에서 만들어진 120여개의 은 십자가가 벽면을 장식한다. "샤넬이나 라크루아의 디자이너들이 이 십자가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았지요. 요즘은 이디오피아 정부가 십자가 반출을 엄격히 금지해 해외로 가져 나올 수도 없는 귀중한 장신구예요."


'다이아몬드를 줘도 안바꿔'


박물관에는 유럽보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등의 장신구가 많다. 유목민이나 고산족들이 소박한 집에 사는 대신 자신의 몸을 꾸미는 데 치중했기 때문에 장신구도 그만큼 화려했기 때문이라고. 이 관장은 자신이 모은 것은 비싼 보석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담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도 시대와 문화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돼왔죠. 장신구도 그 하나죠. 근데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제가 이런 장신구들을 봤을 때 가졌던 감동과 흥분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